나음 당했다는 MZ세대의 절규와 니체의 아모르 파티, 반출생주의 시대의 삶 긍정법


최근 MZ세대 사이에서 화두가 된 나음 당했다는 표현은 단순한 유행어를 넘어 존재의 근원적 고통을 직시하는 시대적 징후다. 본 포스트는 데이비드 베네타의 탄생해악론과 고대 그리스 비극이 말하는 존재의 부조리함을 깊이 있게 살펴본다. 또한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모리오카 마사이로의 존재 긍정 철학과 니체의 아모르 파티, 그리고 위버멘쉬 사상을 탐구한다. 삶이 비록 내가 선택하지 않은 계약일지라도, 그 운명이라는 무대 위에서 나다움을 발견하고 능동적으로 춤추는 예술가가 되는 길을 제시한다.


나음 당했다는 MZ세대의 절규와 니체의 아모르 파티
나음 당했다는 MZ세대의 절규와 니체의 아모르 파티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된 삶이라는 계약


“나음 당했다.” 이 서늘한 MZ 세대의 신조어는 단순한 유행을 넘어 한 세대의 정서를 가로지르는 통렬한 자기 보고서다. 마치 내가 서명하지 않은 계약서처럼 어느 날 갑자기 삶이 주어졌고, 그 부당한 계약의 의무를 이행하듯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는 체념. 이는 ‘나는 굳이 태어날 필요가 있었을까?’라는, 인간 존재의 가장 근원적인 질문을 현대의 언어로 다시 소환한다.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사건에 대해 무한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이 기묘한 불균형은 삶을 하나의 거대한 부채처럼 느끼게 만든다. 우리는 왜 태어났는가? 이 두려운 질문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하는 철학적 여정은,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답을 줄 수 있을까?



‘나음 당함’의 시대, 존재론적 비명의 사회학

헬조선
헬조선


2020년대 중반, 대한민국 사회를 관통하는 정서적 기류는 더 이상 단순한 경제적 불황이나 정치적 불만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은 생명 탄생의 근원적 가치에 대한 회의, 더 나아가 존재 자체에 대한 거부로 심화되었다. 


특히 MZ세대(1980년대 초~2000년대 초 출생)와 그 이후 세대인 알파 세대 사이에서 회자되는 “나음 당했다”라는 표현은 이러한 시대정신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적 언어다. 이는 자신이 주체적으로 삶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타인(부모)의 욕망이나 사회적 압력, 혹은 생물학적 우연에 의해 이 고통스러운 세계로 ‘강제로 소환되었다’는 피동적 피해 의식을 내포한다.


과거 ‘헬조선(Hell Joseon)’ 담론이 한국 사회의 불합리한 구조와 계급 고착화를 지옥에 비유하며 사회 개혁이나 탈출(이민)을 꿈꾸는 역설적 희망을 품고 있었다면, “나음 당했다”는 절규는 문제의 원인을 ‘사회 구조’에서 ‘존재 그 자체’로 이동시킨다. 


이는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고통도 없었을 것”이라는 반출생주의(Antinatalism)적 직관과 맞닿아 있으며, 출산율 0.7명대라는 인구절벽의 현실을 지탱하는 철학적 기제로 작동하고 있다.



헬조선의 진화 – 사회적 분노에서 존재론적 체념으로

수저계급론
수저계급론


한국 사회의 절망을 표현하는 언어는 지난 10년간 급격히 진화해왔다. 2010년대 중반 등장한 ‘헬조선’은 지옥(Hell)과 봉건적 신분제 사회인 조선(朝鮮)의 합성어로, 노력해도 신분 상승이 불가능한 현실을 비판하는 용어였다. 


당시에는 “노력하면 된다”는 기성세대의 조언(소위 ‘꼰대’ 담론)에 대한 반발과 함께, “탈조선(한국을 떠남)”이라는 대안이 논의되기도 했다. 이는 고통의 원인이 ‘한국’이라는 특정 공간과 시스템에 있다는 인식에 기반했다.


그러나 2010년대 후반, ‘수저계급론’의 고착화와 함께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이라는 자조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이는 불교적 윤회관을 차용하여 현세의 삶을 ‘망해버린 게임 판’으로 규정하는 결정론적 비관주의였다. 


그리고 2020년대, 마침내 등장한 “나음 당했다”는 표현은 비관의 대상을 ‘국가’나 ‘이번 생의 조건’을 넘어 ‘생명 현상’ 자체로 확장시켰다. “부모님은 나를 사랑해서 낳았다고 하지만, 내 동의는 없었다”라는 어떤 청년의 독백은 효(孝)라는 전통적 가치관과 정면으로 충돌하며, 출산을 ‘생명 선물’이 아닌 ‘고통의 강요’로 재정의한다. 



2024-2025 인구 통계와 사회적 고통의 지표


이러한 철학적 비관은 객관적인 지표로 뒷받침된다. 통계청이 발표한 2024년 인구동향조사에 따르면, 한국의 합계출산율은 2023년 0.72명에서 2024년 0.75명으로 미세하게 반등했으나, 이는 여전히 OECD 국가 중 압도적인 최하위이며 인구 소멸 수준인 1.3명에 한참 미치지 못한다. 


특히 2025년 2월의 통계 분석에서도 30대 산모의 출산은 소폭 증가했으나 20대 출산율은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어, 청년 세대의 출산 기피 현상은 구조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청년들이 느끼는 고통의 실체는 다음과 같다.

무한 경쟁과 서열화: 대학 입시부터 취업까지 이어지는 끝없는 경쟁은 삶을 전쟁터로 만든다. “3학(대학교 3학년의 어려움)”, “사망(4학년의 취업난)” 등의 은어는 이러한 학업 스트레스를 반영한다.

경제적 불가능성: 서울의 아파트 중위 가격은 소득 대비 주택 가격 비율(PIR)이 세계 최고 수준이다. 평범한 노동 소득으로는 주거 안정을 이룰 수 없다는 좌절감은 “노력의 배신”을 확인시켜 준다.

비교의 지옥: SNS의 발달은 타인의 하이라이트와 자신의 비하인드를 끊임없이 비교하게 만들며, 상대적 박탈감을 극대화한다.


이러한 환경에서 청년들은 생각한다. “내 아이에게 이 지옥을 물려주는 것은 범죄다.” 이는 단순한 경제적 계산이 아니라, 윤리적 판단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탄생 부정의 오랜 역사 – 현대적 절규의 기원

소포클레스, 테오그니스, 괴테
소포클레스, 테오그니스, 괴테


‘나음 당했다’는 정서가 새로운 것(신조어)이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이는 인류의 역사와 철학 속에 깊이 뿌리내린, 놀랍도록 보편적인 문제의식의 가장 현대적인 발현일 뿐이다. 인간의 출생과 탄생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는 사상, 즉 반출생주의(Antinatalism)의 계보는 인류의 고뇌만큼이나 길다.


고대 그리스 문학은 이미 “가장 좋은 것은 태어나지 않는 것”이라 읊조렸고, 근대의 대문호 괴테는 『파우스트』를 통해 탄생을 저주하는 처절한 절규를 토해냈다. 


비극의 거장 소포클레스(Sophocles)는 그의 말년 작 『콜로노스의 에디푸스』 (Oedipus at Colonus)에서 다음과 같은 유명한 구절을 남겼다.

“태어나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 가장 좋으나, 일단 태어났다면 가능한 한 빨리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그 다음으로 좋다.” (1224~1226행)


기원전 6세기 시인 테오그니스(Theognis)의 우아(Elegiac) 역시 비슷한 비탄을 노래했다.

“지상에 사는 인간에게 가장 좋은 것은 아예 태어나지 않는 것이고, 태양의 빛을 보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태어났다면, 죽음의 문을 빨리 통과하여 대지 아래 묻히는 것이 가장 좋다.”


이러한 사상은 당시 그리스인들 사이에서 인생의 덧없음과 고통을 표현하는 하나의 격언처럼 통용되었다.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의 대작 『파우스트(Faust) 1 서재 장면』에서 악마 메피스토펠레스(Mephistopheles)가 자신을 파우스트에게 소개하며 던지는 대사가 바로 탄생과 존재에 대한 처절한 부정이다.

“나는 항상 부정하는 영(靈)입니다! 그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생성되는 모든 것은 멸망할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아예 아무것도 생겨나지 않는 것이 더 좋았을 것입니다. 당신들이 죄라고 부르는 것, 파괴라고 부르는 것, 간단히 말해 악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이 바로 나의 고유한 요소입니다.”


여기서 “아예 아무것도 생겨나지 않는 것이 더 좋았을 것”이라는 표현은 존재 자체에 대한 근원적인 거부와 저주를 담고 있다.


또한 철학의 영역에서는 쇼펜하우어가 맹목적인 의지로 가득 찬 이 세계를 고통의 바다로 규정하며 비관론의 정수를 보여주었고, 동양에서는 원시불교가 삶을 본질적으로 고(苦)로 파악하며 그로부터의 완전한 해탈을 궁극의 목표로 삼았다.


이처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는 탄생의 의미에 끈질기게 회의를 품어왔다. 이 장대한 역사적 맥락 위에서 볼 때, 오늘날의 외침은 갑자기 등장한 낯선 돌연변이가 아니라 오랜 시간 축적된 인류의 고뇌가 21세기라는 새로운 토양 위에서 터져 나온 것이다. 그리고 이 오랜 감정을 가장 정교하고 날카로운 논리로 벼려낸 현대 철학이 있다.



‘태어나지 않는 것이 더 낫다’는 논증 – 데이비드 베네타의 탄생해악론

데이비드 베네타, 모리오카 마사이로
데이비드 베네타, 모리오카 마사이로


탄생에 대한 부정적 감정을 가장 급진적인 논리로 무장시킨 현대 철학이 바로 남아프리카공화국 철학자 데이비드 베네타(David Benatar)의 ‘탄생해악론'(Anti-natalism: Better Never to Have Been: The Harm of Coming into Existence)이다. 그는 서론에서 소개된 실존적 불안에 대해, 감정이 아닌 냉철한 논리로 답한다. 그의 주장은 단호하다. 

“누구든지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 태어나지 않는 것보다 틀림없이 나쁘다.” 


이 섬뜩한 명제를 뒷받침하는 핵심 논리가 바로 ‘고통과 쾌락의 비대칭성’이며, 그 구조는 다음 네 가지 전제로 요약된다.

쾌락의 존재는 좋다(Good)
고통의 존재는 나쁘다(Bad)
쾌락의 부재는 나쁘지 않다(Not bad)
고통의 부재는 좋다(Good)


이해를 돕기 위해, 철학자 모리오카 마사이로(Morioka Masahiro)가 제시한 ‘외딴 섬의 비유’를 빌려와 확장해보자. 섬에 사람들이 존재하여 쾌락을 즐긴다면 그것은 ‘좋음’이다. 반면 고통을 겪는다면 ‘나쁨’이다. 


그렇다면 섬에 아무도 없는 상태는 어떨까? 쾌락이 없다는 사실은 ‘나쁨’이 아니다. 그 부재를 아쉬워할 주체가 없으므로 이는 그저 가치중립적인 ‘나쁘지 않음’일 뿐이다. 그러나 고통이 없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명백히 ‘좋음’이다.


여기서 핵심은 이 판단이 누군가의 ‘느낌’이 아니라 ‘세계의 상태’에 대한 평가라는 점이다. 가령 우리는 어떤 나라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상태를, 그 평화를 느끼고 안도할 주체가 존재하지 않더라도 “전쟁이 있는 상태보다 더 나은 상태”라고 평가한다. 마찬가지로 베네타는 고통 그 자체가 악이므로, 고통을 겪을 주체의 존재와 무관하게 고통이 없는 ‘상태’가 더 낫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 비대칭 구조를 통해 그는 ‘비존재가 존재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존재의 상태는 좋음(쾌락)과 나쁨(고통)이 공존하지만, 비존재의 상태는 좋음(고통의 부재)과 나쁘지 않음(쾌락의 부재)만 있기 때문이다. 


이 논리는 하나의 완벽한 성채처럼 보인다. 그러나 모든 성채에는 보이지 않는 균열이 있기 마련이다. 베네타의 성채, 그 아킬레스건은 어디에 있을까?



논리적 함정의 발견 – ‘존재’와 ‘생성’의 착각

염세주의의 아이콘 에밀 시오랑(Emil Cioran)
염세주의의 아이콘 에밀 시오랑(Emil Cioran)


베네타의 탄생해악론은 얼핏 견고해 보이지만, 이 지점에서 철학자 모리오카 마사이로는 그 이론의 치명적 허점을 파고든다. 바로 ‘존재’의 차원과 ‘생성’의 차원을 혼동하는 근본적인 오류다.


이 문제를 명확히 이해하기 위해, 염세주의의 아이콘 에밀 시오랑(Emil Cioran)의 모순적인 삶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그는 평생에 걸쳐 탄생을 “진짜 불운”이라 저주했고, 언제든 자살할 수 있는 인간을 찬미했다. 그러나 정작 그는 84세에 삶을 자연사로 마감했다. 


우리는 이를 단순한 비일관성으로 치부할 수 있지만, 여기에는 ‘자살’과 ‘탄생 부정’ 사이의 건널 수 없는 심연이 존재한다. 자살은 ‘이미 존재하는 나’의 미래를 삭제하는 행위다. 반면 탄생 부정은 ‘나’라는 존재 자체가 애초에 생성되지 않았기를 바라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려는 실현 불가능한 염원이다.


베네타의 오류는 영화 평론가가 영화가 상영되는 ‘스크린의 상태’를 논하면서, 정작 그 영화가 ‘촬영되지 않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스크린의 밝음(쾌락)과 어두움(고통)을 비교하는 것은 이미 존재하는 영화를 전제로 한다. 


그러나 영화의 ‘생성’ 자체를 문제 삼으려면, 평론가 자신을 포함한 모든 관객이 상영관에서 사라져야 하며, 그 순간 평가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해진다.


베네타의 비교, 즉 “내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라는 상상 역시 ‘현재 존재하는 나’라는 관찰자가 스크린 앞에 남아 있을 때만 가능하다. 하지만 ‘내가 애초에 태어나지 않았다면(생성되지 않았다면)’을 제대로 상상하려면, 지금 이 상상을 하는 ‘나’라는 주체마저 지워야 한다. 


좋고 나쁨을 판단할 주체가 사라진 그 무(無)의 상태에 대해 우리는 어떤 가치 판단도 내릴 수 없다. 결국 베네타는 ‘존재’의 차원에서 내린 판단을 ‘생성’의 차원으로 성급하게 확장하는 논리적 착각을 범한 것이다.


탄생해악론의 논리적 기반이 이처럼 흔들린다면, 우리는 탄생이라는 사건을 전혀 다른 관점에서 바라볼 철학적 대안을 찾아야만 한다.



고통 속에서의 긍정 – 니체의 대안적 시선

Friedrich Wilhelm Nietzsche
Friedrich Wilhelm Nietzsche


삶의 고통을 계산하고 회피하려는 시도 대신, 그것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긍정의 철학을 펼친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는 반출생주의에 대한 가장 강력한 대안을 제시한다. 니체의 관점에서 쾌락과 고통은 분리할 수 없는, 삶이라는 직물의 씨실과 날실이다. 그는 우리가 얻는 한순간의 쾌락에는 반드시 그 쾌락을 가능하게 한 고통의 역사가 땅속줄기처럼 이어져 있다고 보았다. 


목마름이라는 고통이 있기에 물을 마시는 쾌락이 의미를 갖듯, 삶의 어떤 한 순간을 진심으로 “다시 한 번!”이라고 외치며 긍정한다면, 그것은 그 순간을 만들어내기 위해 거쳐야 했던 수많은 고통의 순간들까지 남김없이 긍정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시선 앞에서, 베네타가 시도했던 것처럼 쾌락과 고통을 별개의 회계 항목처럼 떼어내어 그 가치를 비교하고 계산하는 행위 자체가 처음부터 성립 불가능한 기획이 된다. 삶은 손익을 따질 수 있는 대차대조표가 아니라, 고통과 쾌락이 뒤섞인 총체적인 사건이기 때문이다.


니체의 철학은 단지 베네타의 계산법을 반박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서론에서 제기된 ‘서명하지 않은 계약서’라는 체념적 비유 자체를 무력화시킨다. 계약의 부당함을 따지는 대신, 계약서 자체를 춤의 악보로 삼으라고 요구하기 때문이다.



니체의 아모르 파티 (Amor Fati)

아모르 파티 (Amor Fati)
아모르 파티 (Amor Fati)


아모르 파티(Amor Fati)는 라틴어로 운명에 대한 사랑을 의미한다. 이는 프리드리히 니체 철학의 정점이자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긍정의 상태를 일컫는 말이다.


① 단순한 수용을 넘어선 능동적 긍정


아모르 파티는 단순히 나에게 일어난 일을 체념하고 받아들이는 소극적인 태도가 아니다. 니체는 자신에게 닥친 고통, 상처, 상실까지도 삶의 필수적인 부분으로 인정하고, 심지어 그것이 다시 반복되기를 원할 정도로 자신의 삶을 열렬히 사랑하라고 가르친다. 


니체는 내가 사물에 있어서 필연적인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보는 법을 더 배우고자 한다고 말하며, 그렇게 하여 나 또한 사물을 아름답게 만드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② 영원 회귀 (아모르 파티의 시험대)


니체는 아모르 파티를 설명하기 위해 “영원 회귀(Eternal Recurrence)”라는 거대한 사유 실험을 제시한다. 만약 어떤 악마가 나타나 당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삶이 영원히 똑같이 반복될 것이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저주할 것인가 아니면 “그래, 다시 한 번!” 이라고 외칠 것인가?


이 질문에 기쁘게 응답할 수 있는 상태가 바로 아모르 파티가 실현된 상태다. 과거의 후회되는 순간이나 현재의 괴로움조차도 내 삶이라는 작품을 구성하는 필수적인 조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는 과거를 그것이 그랬었다(It was)에서 내가 그렇게 되길 원했다(I willed it so)로 바꾸는 창조적인 행위다.


③ 염세주의와 탄생해악론에 대한 응답


앞서 살펴본 데이비드 베네타나 에밀 시오랑이 존재의 고통을 이유로 탄생을 부정했다면, 니체는 고통이야말로 인간을 성장시키는 촉매제라고 보았다. 그는 삶이 비극적이고 고통스럽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비극성을 정면으로 마주하고도 삶을 찬미할 수 있는 강한 정신, 즉 “초인(위버멘쉬: Übermensch)”의 길을 제시했다.



베네타와 니체의 관점 차이

데이비드 베네타: 고통이 있으니 태어나지 않는 것이 이득이다. (회피와 부정)

프리드리히 니체: 고통조차 내 운명의 일부이니 사랑하고 극복하라. (직시와 긍정)


아모르 파티는 내 삶의 주인이 되어 필연적인 운명조차 나의 의지로 선택한 것처럼 사랑하라는 명령이다. 니체는 이를 통해 허무주의의 늪에서 벗어나 창조적인 삶으로 나아갈 것을 촉구했다.


더불어 아모르 파티는 삶과 치열하게 싸우라는 명령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내가 아주 정성스럽게 고른 옷처럼 나의 삶을 입어보라는 권유에 가깝다. 나에게 주어진 환경이나 성격, 심지어 내가 싫어하는 나의 모습까지도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니체는 인간의 정신이 변하는 과정을 세 단계로 설명했다. 처음에는 남의 짐을 짊어진 낙타처럼 살다가, 다음에는 그 짐을 거부하는 사자가 된다. 하지만 마지막 단계는 어린아이다. 어린아이는 과거를 탓하지 않고,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그저 지금 이 순간 자신만의 놀이에 집중한다.


남의 짐을 짊어진 낙타→ 짐을 거부하는 사자→ 어린아이


나답게 산다는 건 거창한 승리가 아니다. 남들이 말하는 성공이나 정답에 나를 맞추지 않고, 내 안의 작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삶이 비록 힘들고 내가 원치 않게 시작된 것이라 해도, 그 안에서 나만의 색깔을 찾아가는 과정 자체가 아모르 파티의 실천이다.


낙담한 청년들에게 필요한 것은 꼰대들의 정신 차리라는 호통이 아닐 것이다. 대신 당신이 겪는 그 흔들림조차 당신이라는 사람을 완성해가는 소중한 과정라는 말을 해주고 싶다. 남의 기준에 휘둘리지 않고 오직 나로 존재할 수 있는 용기, 그것이 니체가 말하고 싶었던 진정한 자기 긍정이 아닐까?



마치며


‘나음 당했다’는 현대적 절규에서 출발한 우리의 사유는 반출생주의의 정교한 논리와 그 치명적 한계를 거쳐, 마침내 니체의 장대한 탄생 긍정론에 이르렀다. 이 여정을 통해 우리는 탄생이 비록 선택의 대상이 아니며 그에 따르는 고통 또한 명백한 실재이지만, 그 자체를 부정하려는 시도는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염원임을 확인했다.


모리오카 마사이로의 표현을 빌리자면, 탄생은 우리가 의문을 제기할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필연성이자 구체적인 운명적 사건이며, 그 위에서 춤추는 운명의 기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던져진 진정한 질문은 ‘태어났어야 했는가’가 아니라 또는 ‘주어진 이 삶을 어떻게 의미 있게 만들 것인가’도 아닌, ‘어떻게 살 것인가’로 전환되어야 한다. 이것은 운명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거나 회피하라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딛고 선 운명이라는 단단한 기반 위에서, 자신만의 리듬으로 기꺼이 춤을 추는 능동적인 삶의 예술가가 되라는 가장 강력한 촉구다.

“청년들이여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라 – Amor Fa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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